이부영
마음의 구조와 기능
마음의 구조와 기능
마음의 구조와 기능
우리 마음의 구조는 의식(consciousness)과 무의식(the unconscious)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이며, 무의식은 모르고 있는 마음이다.
무의식은 다시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된다. 의식계에서는 ‘나(ich, ego)’를 찾을 수 있으며, 무의식계에는 ‘그림자’, ‘아니마'(Anima) 또는 ‘아니무스'(Animus), ‘자기'(Self)라는 특별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서 심리적 복합체인 콤플렉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콤플렉스는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자아와 의식
자아 또는 ‘나’는 의식의 중심에서 의식된 마음을 통솔하고 무의식의 마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특수한 콤플렉스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자아 콤플렉스라고도 한다.
내가 아는 모든 것, 기억하는 모든 것, 그리고 나의 생각, 지각, 느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자아를 인식하지는 못한다. 갓난아기도 지각과 반응, 표현을 보이지만, 이는 아직 인식의 주체라기보다는 무의식적 형태 속에 숨겨진 잠재력의 표현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이 무의식에서 ‘나’가 탄생한다. 무의식 속에 있는 나의 싹은 아이의 성장과 함께 움트고 자라난다.
자라면서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자아의식이 강화되고 그 영역이 확장되면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대립과 긴장이 생겨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집단사회의 행동규범과 역할을 ‘페르소나'(Persona: 고대 그리스의 연극 가면)라고 부른다. 이는 집단정신에서 비롯된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를 의미하며, 해당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사고와 행동의 유형을 말한다.
‘나’는 이러한 ‘페르소나’를 학습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면서 사회 속을 살아간다.
무의식의 내용과 의식화 과정
무의식(the unconscious)은 말 그대로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으면서 매 순간 의식생활에 영향을 주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마음의 영역이 바로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의식의 내용으로 동화시킬 수 있다. (‘의식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철학적 ‘인식’과의 혼동을 피할 수 있다. ‘의식화’는 곧 ‘깨달음’이다.)
무의식은 자율적 의지로 의식을 자극하여 스스로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다.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대면을 피할 때, 무의식은 자아를 자극하여 무의식적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항상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창조적 자극의 영향 아래 있으며, 때로는 이것이 고통스러운 체험이나 신체적·정신적 병고의 시련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은 전적으로 자아의 몫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창조적 작용을 융의 심리학에서는 자율성(autonomy)과 보상작용(compensation)이라 한다.
무의식은 자아의식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이를 교정하기 위해 의식의 방향과는 반대되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보내 균형을 맞춘다.
예를 들어, 지나치게 이성적인 남자는 꿈에서 매우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거나 평소와 다른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또는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은 꿈에서 깃발을 들고 시위 행진의 선두에 선 영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단순한 욕구충족이 아닌, 의식의 편향성을 깨우치고 의식이 간과하는 것을 일깨우려는 무의식의 의도이다.
자기인식이 부족할수록 무의식의 보상작용은 더욱 강해지며, 이러한 과보상(overcompensation)은 결국 의식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교란시켜 신경증적 증상이나 생리적 이상을 초래하게 된다.
그림자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림자’라는 심리적 내용이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으로,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즉, 자아가 배척하여 무의식 속에 억압한 성격의 측면을 말한다.
그림자는 본래 의식과 가까운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이다. 따라서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같은 성性을 가진 대상에게 투사되며, 그 속에서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융은 이 그림자 개념을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에도 적용한다.
모든 원형상原型像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창조와 파괴의 양면이 공존한다.
우리의 무의식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핵심적인 원형이 있다. 이를 자기원형(Archetypus des Selbst)이라 하는데, 이 역시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원형적 그림자는 개인적 무의식의 ‘나’의 그림자보다 훨씬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다. 이는 신화적 상像으로 나타나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원형적 그림자상이 외부로 투사되면, 사람들은 일상적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증오감, 혐오감, 공포감을 경험하게 된다. ‘마귀’, ‘사탄’이라 부르는 존재들이 자기원형의 그림자상이 될 수 있다.
개인적 무의식의 그림자는 의식화하여 의식에 동화시키면 의식의 시야가 넓어지고, 그림자의 부정적 작용이 건설적 기능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집단적 무의식의 그림자는 그대로 의식에 동화할 수 없다. 그림자원형뿐 아니라 아니마, 아니무스 등 모든 원형은 그 존재를 인식할 수는 있어도 의식의 일부로 동화할 수 없다. 이는 원형이 지닌 강렬한 에너지가 감정적 충격의 형태로 의식에 작용하여 의식의 기능을 지배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전율할 만한 파괴적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무의식의 원형적 그림자에 사로잡히지 않는 면역력을 얻을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아니마와 아니무스란 무엇인가? 아니마는 독일어 ‘Seele'(심령)에서, 아니무스는 ‘Geist'(심혼)에서 유래한 라틴어 용어이다. 우리 마음속의 혼, 넋, 또는 심령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을 표현하며,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이러한 독자적 인격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내적 인격이라 불렀는데, 이는 집단 사회에 적응하며 형성된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무의식적 인격이다. 외적 인격이 타고난 성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의 특성을 나타내듯이, 내적 인격도 남성과 여성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인다. 남성의 무의식적 내적 인격은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적 내적 인격은 남성적 속성을 띤다. 이러한 여성적, 남성적 속성은 단순한 집단사회의 전통적 성역할과는 다르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여성이 남성에 대해 체험한 모든 것이 축적된 것으로, 우리의 꿈과 신화, 민담의 상징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상징은 여신이나 영웅신, 선녀 같은 인격적 이미지뿐 아니라, 새나 사슴, 바람 같은 비인격적 이미지로도 표현될 수 있으며, 때로는 물질이나 이념에 투사되기도 한다.
원초적 여성성은 다양한 성질을 나타내며, 특히 남성들이 자신의 페르조나로 인해 소홀히 하기 쉬운 감성(pathos)과 예감 능력으로 표현된다. 원초적 남성성은 여성들이 간과하기 쉬운 논리적 사고(logos)와 지혜의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실제로 관찰되는 내적 인격의 표현은 남성에게서는 주로 기분(mood)으로, 여성에게서는 의견(opinion)으로 나타난다.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방치하면 다른 무의식의 내용처럼 미숙한 상태로 머무른다. 이때 그 부정적 작용이 드러나는데, 남성의 경우 변덕스러운 기분과 짜증 섞인 잔소리로, 여성의 경우 경직된 논쟁적 태도로 표출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특별한 원형으로서, 자아의식을 무의식의 심층인 ‘자기’로 이끄는 안내자(psychopompos) 또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을 인식하여 인격을 통합하고 분화하는 것은 자기실현의 핵심 과제가 된다.
자기self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이는 의식의 중심인 ‘나'(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거대한 전체정신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다. 우리가 ‘자아실현’이 아닌 ‘자기실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를 특별히 자기원형이라 부른다.
“우리는 원형 그 자체를 모른다. 그것은 인식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융은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원형 그 자체를 직접 인지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원형의 상(이미지)만을 인지할 수 있다. 이 상은 인간의 꿈, 환상, 신화, 민담, 종교적 표상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상, 붓다상과 같은 인격적인 신의 상에서, 또는 금강석, 장미 등의 꽃, 빛, 기하학적 구성, 중심이 강조된 만다라상 속에서 자기원형이 표현된다. 이는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치유의 능력을 지닌다.
원형이란 지리적·인종적 차이, 문화, 시대사조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행동양식의 원초적 조건이다. 따라서 자기원형은 모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개인의 마음을 통합하고 잠재된 능력을 충분히 발현하도록 하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이며, 자기는 언제나 자아보다 크다. 자기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늘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게 된다.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 완전한 인간이 아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자기원형과 동일시함으로써 야기되는 자아의 팽창(Inflation)은 결코 자기실현의 진정한 증거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