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Louise von Franz

융의 신화를 읽다 1: 융의 문화적 유산

1. 융의 무의식 개념과 그 유산

1. 융의 문화적 영향력과 그 특성

 
우리 시대 융의 신화-C.G.융이 우리 시대의 문화에 끼친 영향-를 서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만 영향을 미친 것과 달리, 융의 창조적 개념들은 인간을 전체적으로 다루었기에 심리학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동시성 개념은 핵물리학과 중국학에서, 종교현상에 대한 이해는 신학에서, 인간에 대한 기본 통찰은 인간학과 인류학에서, 심령현상 연구는 심령심리학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융의 저술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고 있기에, 오히려 우리 정신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디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보건대 그의 영향력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단계라 하겠다.
 
언젠가 융은 이런 말을 했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은 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것은 긴 시간과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저술 활동에 임했기에, 그의 영향력이 서서히 퍼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자들이 융의 저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수많은 사실 자료를 검토하며 깊이 성찰한 과정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융이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발견한 무의식의 배열에서 드러나는 창조적 독자성이다. 특히 만년의 저작에서 융은 자신의 글 속에 무의식이 의식과 함께 직접 말하도록 했다(“나는 모든 것을 이중의 토대 위에서 적었다”라고 그는 말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한편으로는 논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논의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사로잡거나 놀라게 하는 “함께 말하는” 무의식의 영향력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함께 말하는 무의식은 융의 독특한 서술양식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고 과학적 논증에 감정과 구체적 요소를 함께 흐르게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2. 융의 무의식 개념과 그 의미

 
융의 생애와 저술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내적 경험에 붙인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내면세계에서 낯선 것이 들이닥치거나, 내면의 영향력이 갑자기 마음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한다. 또한 꿈을 꾸거나 어떤 착상이 떠오를 때, 그것이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낯설고 거대한 무언가가 떠오른 것임을 느낀다.
 
옛날에는 이런 무의식의 작용을 신적神的인 유동체(정신적 영향력, 신기-역주), 마나Mana, 또는 신神, 데몬, 영靈의 작용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력이 자신의 주체성과 무관한 객체적 존재이며, 더욱이 매우 낯선 독자적 존재라고 느꼈기에, 그러한 이름들을 통해 이를 표현했다. 이런 이름들은 의식의 자아를 사로잡은 강력한 힘에 대한 체험을 적절히 담아냈다. 융은 이러한 강력한 꿈과 착상, 그리고 영향력을 어린 시절부터 체험했으며, 그의 저서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을 통해 이를 전하고 있다.
 
그는 객체적이며 심혼적인 현상들이 존재한다는 통찰을 얻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무의식적이지만 상대적으로 인격에 속하며, 억압된 것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융은 무의식적 정신영역의 이 창조적인 비밀을 탐구하는 데 후기 작업 전체를 바쳤다. 무의식의 내적 체험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융이 서술하는 무의식의 의미를 이해한다. 반면 정확한 정의만을 찾으려는 지적인 사람들에게 무의식의 개념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식적 현상의 궁극적 실체에 대해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을 관찰하는 정신(Psyche)이 바로 그 경험을 만드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궁극적 본질을 규정하려 하기보다, 겸손한 자세로 그 경험을 정리하고 상세히 서술하고자 할 뿐이다.
 

3. 학문적 인식의 상대성과 융의 관점

 
오늘날 모든 전문 과학분야의 기초연구는 한 가지 통찰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른바 ‘순수과학’이라 불리는 물리학이나 수학에서조차 절대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구자의 정신적·심리적 전제들과 ‘시대정신’, 그리고 연구결과를 전달하는 능력이 모든 문제를 상대화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이 더욱 두드러진다. 정신이 연구 대상인 동시에 연구 주체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찍이 이 통찰에 이르렀고 모든 학문적 인식의 상대성을 깊이 확신하였다. “학문적 진리는 나에게 어떤 순간을 충족하는 가설이지, 모든 시간에 통용되는 신앙 개조가 아니다!” “나는 어떤 체계도, 어떤 보편적 이론도 제창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작업의 도구로 이바지할 보조 개념을 설명할 뿐이다.” “나는 우리의 지각이 모든 존재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해와 이해된 것은 그 자체가 정신적인 것이고, 그만큼 우리는 정신세계 속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다.” 그러니 어떤 보편타당한 진리도 성립될 수 없다. 그저 심적 사실들의 올바른 표현이 가능할 뿐이다. 만약 그 심적 사실들이 보편적인 인간적 토대 위에 있다면, 자연히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융에게 그의 심리학적 통찰과 무의식에 대한 관점이 종교의 원시적 근원 상태, 즉 샤머니즘이나 나스카피 인디언의 종교와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스카피 인디언의 종교에는 사제나 의식이 없으며, 단지 그들의 꿈을 따르고 그 꿈이 “가슴속에 있는 불사의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온다고 믿을 뿐이다. 
 
이에 융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불명예스러운 건 아니지!”-
융의 신화

2. 신은 죽었다

1. 융의 어린 시절과 종교적 트라우마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융의 어린 시절 체험과 맞닿아 있다. 1875년 7월 26일 케스빌(투르가우 주)에서 태어난 융은 생후 첫 해를 라우펜의 목사관에서 보냈는데, 어린 시절부터 음울한 분위기의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는 집 근처 묘지에서 시신이 매장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사람을 자기 곁으로 데려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더구나 어린이용 기도서의 내용을 오해하여 예수님을 사람을 잡아먹는 존재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변질된 것은 단순히 이러한 외부적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기독교 교회의 분위기 자체가 문제였다. 종교적 신앙은 이미 본래의 생동감을 잃어버린 채,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생활양식으로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 “신의 죽음”의 의미와 융의 해석

사람들이 “신이 죽었다”고 할 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신이 인간의 체험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면, 그런 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다. 과거 세대에게 ‘신(神)’이라는 말은 생동감 넘치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가진 신에 대한 상(像, 이미지)이나 정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과거 세대의 신상(神像) 속에서 심적으로 살아있던 것, 그들이 신을 감동적으로 숭배하게 만든 그 심혼적 작용인(心魂的 作用因)은 여전히 살아있다. (융이 후에 체험하고 증명하고자 했던) 신은 결코 과거의 상이나 정의 속에 진정으로 “갇혀있었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신은 다시 그곳에서 나와 자신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처럼 “신이 죽었다”고 말하기보다, 융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인간에게 최고의 생명력과 의미를 부여하던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신은 이미 우리가 만든 상(像)을 벗어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4. 문화적 맥락에서의 신의 죽음

한 문화공동체가 고유의 “신”을 잃는 현상과 이로 인한 심각한 사회적·심리적 위기는 역사에서 흔히 반복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많은 종교의 신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신의 죽음이라는 주제는 기독교 비의(秘儀)의 핵심인 십자가 처형, 그리스도의 매장과 부활의 이미지 속에도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