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l Gustav Jung
융의 회상, 꿈: 무의식이 실현한 역사
무의식이 실현한 역사
1. 무의식과 자아실현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어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 조건들을 바탕으로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형성 과정을 묘사할 때 나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과학의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경지에서 본 우리의 존재, 인간이 그 영원한 본질적 성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은 오직 신화로써만 묘사될 수 있다. 신화는 과학보다 더욱 개성적이고 정확하게 삶을 묘사한다.
과학은 평균 개념으로 작업하는데, 이는 너무 일반적이어서 한 개인의 특유한 삶이 지닌 주관적 다양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여든세 살의 나이에 나의 인생의 신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작업을 맡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직접 확인한 바를 말하는 것, 다시 말해 “지나온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다만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이며, 나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여러 면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인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 인간 존재의 본질과 한계
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끝없는 신성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의 정신적 과정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며,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우리는 단지 그런 종국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모든 것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한 사람의 인생 역사는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지점에서 시작하지만, 이미 그 시작점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우리는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명확한 시작도, 뚜렷한 목표도 없이 흘러간다.
3. 인생의 은유와 영속성
나는 인생이 자신의 뿌리를 통해서 살아가는 식물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식물의 진정한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고 뿌리에 숨어 있다. 지상에 드러난 것은 여름 동안만 존재하다가 시들어버리는, 순간적인 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삶과 문화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을 보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을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사라진다. 그러나 뿌리는 계속된다.
사실 내게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주로 내적인 체험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의 꿈과 명상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은 동시에 나의 과학적 작업의 원료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연금술사의 돌이 응결될 불타는 용암과도 같았다.
여행, 인간, 환경에 관한 다른 추억들은 내적인 사건들 앞에서 모두 빛을 잃고 만다. 시대적 역사는 많은 이가 겪었고 기록했다. 그런 책을 읽거나 다른 이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나의 인생의 외부적 사실들에 관한 추억은 대부분 퇴색하고 소멸되었다.
그러나 다른 현실과의 만남, 무의식과의 부딪힘은 내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거기에는 언제나 풍성함과 충만함이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밀려났다.
4. 내면의 가치와 자기이해
나는 일찍부터 깨달았다. 삶의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내면으로부터 아무런 해답이나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런 문제들은 결국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밖의 상황이 안의 상황을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은 외부 사건의 측면에서 보면 빈약하다. 나는 그것에 관해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오직 내적인 현상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내 인생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이러한 내적 현상을 다루고 있다.
